
전라북도 무주는 많은 여행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여행지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지역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 체험, 야외 모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무주의 숨겨진 보석을 알아보고 잊지 못할 여행을
위한 추천을 공유하겠습니다.
1. 붓 끝에서 태어난 조선후기 화단의 거장 최북
최북은 조선시대 영조,정조 시대에 활동한 직업화가로서 조선의 반고흐라 불리울만큼 기이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최북의 성질은 불같은 성격으로 괴팍한데다 오기ㆍ고집ㆍ자만 등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 기행과 취벽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 구룡연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명인
최북은 천하명산에서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물 속에 뛰어든 일이라든가 어느 벼슬아치가 그림을 요청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협박하자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하고는 평생을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은 물론 우리나라 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광기 있는 화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최북은 꽃과 풀, 새와 짐승, 바위, 고목, 메추라기와 호랑나비를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려 '최산수'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입니다.
성격이 괴팍한 최북에게 친구도 없었을 것 같지만 그를 아끼고 돌봐준 사람들은 많았는데
당대 예림의 총수라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이 1766년 10월 친구들과 <사노회>를 결성할 때 <아집도> 를 최북이 그려 주었고 당시 최고의 서가였던 이광사(1705~1777) 같은 학ㆍ예 겸조의 명망가들과 함께 단양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소문난 신광수(1712~1775)도 최북의 그림 <설강도> 에 『최북설강도가』라는 시를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서평 공자와 바둑으로 교우를 돈독히 나누었고 순조 때 재상을 지낸 남공철은 물론 당대 최고의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1681~1763)이 최북이 일본에 갈 적에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송별시 역시 최북을 아낀 흔적이 아닐 수 없으며 이단전( ~1790), 이현환(1713~1772)과도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최북은 <서상기>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수호전>은 영웅호걸들이 나쁜 벼슬아치들을 의리, 용기, 무예, 지혜로써 혼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조선에 처음 유입된 이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로 지목된 바 있습니다.
이를 보면 최북은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고 당시의 현실사회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북은 최산수ㆍ최수리ㆍ최묘란 별명에서 보듯이 산수화는 물론 인물, 화훼, 영모, 괴석 등 여러 분야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인 화가였습니다. 최북의 전하는 작품은 약 80여종이 넘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추경산수도> , 간송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는 <수각산수도> ,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강조어도> , 호암미술관 등에 몇 점만이 소장되어 있을 뿐 대부분 개인들이 보관하고 있으며 1757년에 그린
<추경산수도> 는 보기 드문 걸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적상산사고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한 전국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춘추관을 제외한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게 되었으나 당시 우리나라 북방이 위험하여 광해 6년(1614)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무주의 적상산에 실록전을 세우고 묘향산의 실록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조 19년(1641) 선원각을 세워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게 되었는데 그 후 일본에 의해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300여 년간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우리나라 5대 사고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사고터는 안타깝게도 적상산
양수발전소댐을 건설하면서 상부댐 안에 수몰되어 안국사와 함께 저수지 윗쪽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적상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절벽 주변에 유난히도 빨간 단풍나무가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산에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지임을 알고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여 그 계기로 축성하였다는 적상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3년(1227년) 월인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안국사 및 사고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로서 조선시대 인조 21년(1643년)에 창건한 호국사터가 있습니다. 현재의 안국사는 이 호국사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3. 신라와 백제의 관문 라제통문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 위치한 구천동 33경 중 제 1경인 라제통문을 찾았습니다.
전라 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석굴로 된 문 높이는 3m이고 길이는 10m이며 설천면과 무풍면에 걸쳐 있는
산줄기에서 두 면의 경계 지점에 암벽을 뚫어서 문을 만들어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위쪽으로 라제통문 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습니다.
백제지역에서 신라지역으로 향하는 입구에 이곳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보면 통일문으로도 불리는 라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도중 설천면 두길리 신두마을과 소천리 이남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통문을 말하는데 무주읍에서 동쪽 19킬로미터의 설천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국경 병참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관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언어와 풍습 등 각각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어 설천장날에 가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와 무풍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을 통일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595~673)이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하여 '통일문'이라고도 하고 나제통문은 무주 구천동의 입구에 있으며 덕유산 국립 공원에
속합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나누는 관문이었으며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의 땅이고 서쪽은 백제의 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동쪽의 무풍현과 서쪽의 주계현을 합쳐서 무주현이라 하였으며 무풍현은 신라의 무산현이 신라의 제35대 임금인 경덕왕(재위 742~765)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 개령군(지금의 경상 북도 김천)에 속해 있었고
주계현은 백제 때 적천현이었던 것이 통일 신라 시대에 단천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시대에 주계현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이남과 새말이라는 두 마을이 1㎞ 정도 떨어져 있는데 행정 구역상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습이 서로 다르고 두 마을의 집안 간에는 혼인도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나제통문을 경계로 하여
동과 서로 나누어지는 두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전혀 달라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나제통문 근처의 무산 성지 부근에는 크고 평평하게 생긴 사선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곳에서 김유신을 비롯하여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바위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으며 나제통문 부근에 있는 '파리소'라고 하는 연못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떼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 부근에 300여 개 정도의 옛 무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일어난 전투에서 전사한 전사들의 무덤 입니다. 실제로 무풍면은 전라북도(무주군), 경상북도(김천시), 경상남도(거창군)의 3개 도가 갈라지는 지역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이지만 방언과 풍습은 경상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문이 과연 삼국시대부터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학자는 물론 이곳을 찾는 많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제기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이 문이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라는데에 대체로 믿음를 보이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을 통일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595~673)이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하여
'통일문'이라고도 하고 나제통문은 무주 구천동의 입구에 있으며 덕유산 국립 공원에 속합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나누는 관문이었으며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의 땅이고 서쪽은 백제의 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동쪽의 무풍현과 서쪽의 주계현을 합쳐서 무주현이라 하였으며 무풍현은 신라의 무산현이 신라의 제35대 임금인 경덕왕(재위 742~765)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 개령군(지금의 경상 북도 김천)에 속해 있었고 주계현은 백제 때 적천현이었던 것이 통일 신라 시대에 단천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시대에 주계현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이남과 새말이라는 두 마을이 1㎞ 정도 떨어져 있는데 행정 구역상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습이 서로 다르고 두 마을의 집안 간에는 혼인도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나제통문을 경계로 하여 동과 서로 나누어지는 두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전혀 달라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나제통문 근처의 무산 성지 부근에는 크고 평평하게 생긴 사선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곳에서 김유신을 비롯하여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바위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으며 나제통문 부근에 있는 '파리소'라고 하는 연못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떼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 부근에 300여 개 정도의 옛 무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일어난 전투에서 전사한 전사들의 무덤
입니다.
결론
전북 무주는 그 자연의 아름다움, 풍부한 문화 경험, 따뜻한 환대로 여행자들을 마음에 남을 경험으로 남길 것입니다.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무주는 모든 여행자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무주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잊지 못할 무주 여행을 계획해보세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