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천해의 아름다움이 모여 여행자의 천국을 만드는 진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 풍부한 문화유산, 독특한 관광명소로 유명한 진도는 고요한 휴식을 원하는 여행자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약속합니다. 진도에서 꼭 방문해야 할 목적지를 여행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완벽한 휴가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드립니다.
1.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첨찰산 첩첩산중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는 운림산방. 산방 마루에 걸터 앉아 운림지를 내려다봅니다. 슬며시 내리는 보슬비에 초가지붕이 젖고 이윽고 뜨락에는 산빛 물이 듭니다. 때 마침 피오르던 안개는 나갈 길이 없는지 운림지 가운데 배롱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어느새 몽환의 세계에 갇힙니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 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 냈던 화실이다. 이곳에는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 등이 있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여상열지사 의 배경이 되기도 하여 더욱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소치는 미산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 - 미산 - 남농 - 임전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 있습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습니다.
2.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신비의바닷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도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 약 2.8km의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바다밑이 40여 m의 폭으로 물 위로 드러나 바닷길이 열린다는 데 신비로움이 있다. 매년 이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수십여만명이 몰려와 바닷길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약 1시간의 기적을 구경한다. 또한, 이날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아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 등을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 와 볼거리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뽕할머니의 제사로 시작된 이 축제는 원형 그대로의 민속민요, 남도 들노래, 다시래기, 씻김굿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주옥같은 공연이 펼쳐집니다. 국내·외 관광객의 흥겨움을 더해 줄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 등 볼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축제때 실시되는 물고기 잡이 행사인 개매기와 조개잡이 체험, 홍주 시음회 등 다양한 체험행사는 많은 관광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축제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옛적에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 중 풍파로 호동(지금의 회동마을)앞 바다에 표류하여 이 마을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호랑이의 침입이 잦아 마을 건너편 모도라는 섬으로 황급히 피신하면서 뽕 할머니 한 분만 남게 되었다.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원하였는데 어느 날 꿈속에 용왕님이 나타나 내일 무지개를 바다 위에 내릴테니 바다를 건너가라는 선몽이 있어 모도와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를 하니 회동의 뿔치와 모도의 뿔치 사이에 무지개처럼 바닷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닷길이 열리자 모도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호동에 도착하니 뽕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기진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신비의 바닷길 체험은 진도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보배섬 진도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휴양, 레저, 체험 등을 제공하며 지역주민들에게 소득증대 기여로 지역경제 활성화 메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 전적지 명량대첩
명량대첩 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싸움은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습니다. 명량대첩 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전 자체만을 놓고 전승의 요인을 분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명량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서는 왜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의병전도 그만큼 활발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까운 육상에서 전개된 연해 지역민의 항전이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명량대첩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가까운 연해지역에서는 영암의 전몽성.류장춘.박문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펼쳐지고 있었으며,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도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대첩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인이 해역의 특성과 조류를 이용한 관방전술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지휘관만의 전술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명량에 최후방어선을 구축한 것부터 현지의 실정과 지리에 밝은 지역출신 인사들의 책략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해전의 전투요원들 대부분이 당해 연해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볼 때 누구보다도 현지 사정에 밝은 그들이 관방에 익숙해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회령포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군진을 옮겨 17일간 머물렀으니 전투준비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참여한 수군의 대부분은 전라우수영 관내, 특히 진도와 해남, 영암지역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향선을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른 우수영 관내 피난민들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량대첩은 자보의식으로 결집된 현지의 지역민들이 수군지휘부와 결합,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싸운 자전자수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난선을 전선으로 활용, 피난민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함께 하였다는 점에서 향보성 의병항전의 성격을 띤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진도는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 즐거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여러분을 매료시킬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탐험하고, 현지 문화에 푹 빠져보는 진도는 잊지 못할 여행을 약속합니다. 그러니 카메라를 준비하고, 탐험을 기다리는 여행자들의 천국 진도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