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 풍부한 역사, 활기찬 지역 문화가 가득한
지역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여행지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남에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여러분의 해남 방문을 잊지 못할 경험으로 만들어 줄 현지, 덜 알려진 여행지 몇 곳을
공개하겠습니다.
1. 역사가 살아 숨을 쉬는 우수영 충무사 명량대첩비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량대첩비와 노산이은상 선생이 제작한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최근에 다시 제작 되었습니다.
그러고 현재 명량대첩비는 원래있던 동외리(전라우수영 )로 이건 되었습니다.
또한 충무사로 오르는 돌계단은 목포유달산에서 직접 돌을 가져다 쌓았다고 합니다.
돌계단 우측에는 수군만호 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등 30여기를 모아 이곳에 모시고 있습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해남 전라 우수영 앞 바다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 를 가만둘 리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뜰에 파묻어 버렸던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것이 막연했습니다. 이들은 미군정청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비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습니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합니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습니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하고 있습니다.
2.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풍광을 품은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은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식생경관이 뛰어나고, 도솔봉, 혈망봉, 고계봉, 가련봉 등 8개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절경을 이루며,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대흥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경승지입니다.
두륜산의 8개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라고 합니다.
오른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힌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들듯 만들면 영락없이 두륜산의 형세가 됩니다.
특히 해탈문에사 바라보는 두륜산은 영락없이 부처가 누워있는 와불의 형세를 나타냅니다.
두륜산의 명칭은 예부터 대둔산이라도도 불렸는데 이는 큰 언덕(산)이란 뜻의 듬 과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 이 붙어 한듬. 대듬. 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현재의 대흥사 이름도 산 이름에 따라 과거 한듬절, 대듬, 대둔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보통 근대이전에는 대둔사, 또는 한듬절로, 근대 이후에는 대흥사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의 승군장으로 그는 묘향산에서 만년을 보낸 후 그의 의발을 이곳에 모셔 두륜산대흥사는
그때부터 숱한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종원으로써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고 대 도량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실제로 임진왜란이나 6․25동란 등 숱한 전란 속에서도 대흥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 백제성왕 22)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사적508호 및 명승 66호로 지정되어 있는 두륜산대흥사는 조선후기 연담유일이나 초의의순과 같은 저명한 스님등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초의선사가 40여년동안 머물며 다도를 중흥시킨 일지암은 한국 차문화의 산실이자 다도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 내린 소백산맥과 지리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의 두륜산 중턱에 가람이 자리하며.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 침계루,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천불상, 서산대사의 호국충정을 모시는 표충사, 차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 일지암, 국보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북암(용화전)을 비롯해 성보박물관에서는 탑산사동종(보물88호)등 다양한 유물과 성보문화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3. 천해의 자연이 선물해 준 바다의 맛
해산물을 좋아하신다면 해남금정시장을 방문해 보세요. 이곳에서는 생선구이, 회, 다양한
해산물 요리 등 그날 잡은 가장 신선한 해산물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분주한 시장 분위기는 경험의 진정성을 더해줍니다.
그 외 음식으로는 가오리 새끼인 간자미는 수컷보다 암컷이 살이 부드럽고 탱탱하다.
찜용 간자미는 입과 내장을 손질하고 바람 부는 곳에서 이틀 정도 말리면 꾸덕꾸덕한 찜용
간자미 재료가 됩니다. 회무침으로 쓸 땐 마름모 가운데 뼈 부분을 자르고, 껍질은 벗겨 낸 뒤 결 반대 방향으로 숭덩숭덩 썰어서 오이, 미나리, 고춧가루, 들기름, 설탕과 버무리면 간자미 회무침이 완성됩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겨우내 도망간 입맛을 찾는 데 제격입니다.
갈치조림은 매콤 짭조름한 갈치의 탱탱함이 계속해서 숟가락을 부릅니다. 갈치조림에 무와 함께 한 자리를 차지한 해남
고구마는 본동기사식당의 아이덴티티다. 갈치조림 국물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밑반찬 여기저기로 젓가락이 분주합니다.
반찬 리필도 가능하니 방문하는 이는 누구든 배가 풍선처럼 부풀게 된다. 맛과 양, 가격의 삼위일체가 완벽합니다.
결론
해남은 일반적인 관광 명소가 아닐 수도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 특별합니다.
숨겨진 해변, 매력적인 자연과 문화유산, 맛있는 향토 요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독특하고 몰입도 높은 경험을
제공합니다. 해남을 방문할 때, 단순히 목적지를 탐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해남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의 마음과 영혼을 발견하고 있습니다.